Remain(+)


2년 가까이 한 글만 붙잡고 있다가 다른 장편을 쓰니 어려움이 많더라고요. 종종 쉼처럼 쓰던 단편의 습관이 나와 이야기를 황급히 매듭 짓기도 하고요. 그런데도 백잔별과 고성하라는 캐릭터의 끝을 적게 되어 무척 뿌듯합니다.

먼저, 단편에서 장편으로 다시 적어본 <잔류>는 이야기 전개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아무런 단서 조차 주어지지 않는 단편과 달리 서로의 생각과 과거의 조각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게 그것이죠. 그렇지만 메인 스트림으로 올라오진 않습니다. 적어도 사건의 주체가 되기 전에 정리되어요.

어떠한 일을 계기로 혹은 진행되면서 발전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이미 사랑은 결말을 맞이하였고, 그것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과정이에요. 그것 또한 사랑의 발전 단계라고 하면, 영 틀린 말은 아니고요.

다만, 주목할 점은 그 어떤 것도 <사랑>이라는 감정 보다 앞서진 못한다는 겁니다. 고성하의 정체나, 백잔별의 뒤에 있을 거라고 생각된 거대한 무언가나, 둘의 과거... 복잡한 감정을 가진 듯한 주변인들. 정말 많은 의미를 지닌 줄 알았던 것이 실은 두 사람에게 있어 큰 자리를 차지 하지 못하고, 설령 사건의 중심에 서더라도 둘은 거기에 제 인생의 방점을 찍진 않습니다.

<의미 있음>이 <의미 없음>으로 간단하게 변화하는 시점이에요. 세상이 뒤바뀌고 천지가 개벽할 것 같은데, 실체를 보면 실은 별것도 아니구나 싶고. 별거여도 내가 별거라고 여기지 않으면, 그리 대단한 게 되지 못하는 구나 깨닫고.

살아가면서 우리는 참 많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곤 해요. 저 사람이 나의 인생에 있어 마지막이다, 저 일을 하지 못하면 나는 죽을 거다, 저걸 먹지 못하면 지금까지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 농담이라도 우리는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라는 감탄사를 쓰고, 문장 끝에 찍힌 온점에도 온 신경을 쏟곤 하죠.

'사랑해'라는 말은 종종 남용되어서 사랑한다는 말이 담은 온전한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지점에 이르는 것처럼, 가장 의미 있는 무언가를 위해선 이따금 의미 없는 것을 도처에 깔아두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제가 쓰고 싶었던 잔류는 바로 그런 글이 아닐까 합니다.

아주 많은 의미 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신과 함께 하는 한 끼였고, 서로 눈을 마주하고 웃음에 구태여 감사할 필요 없는 당연한 하루이고, 무엇보다 깍지 낀 손을 놓을 필요가 없음을 불현듯 차창에 비친 그의 옆모습에서 깨닫는 거요. 깨닫고도 너무 당연하고, 스스럼 없는 생각이라 이만 흘려보내고 마는 나의 밤이요.

처음 잔류를 쓰려는 계획을 적고, 써가는 와중에도 아주 거대한 이야기를 계획하였는데요. 이 둘이 원하는 것은 결국 서로 밖에 없기에, 우주의 섭리도, 태양이 존재하는 이유도, 삶과 죽음이 뒤바뀌는 원리도 실은 불필요하고, 궁금하지 않은 것이라고요.

우린 두 사람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단어로 표현하기엔 너무 거대한 것을 끌어와 풀어놓곤 하는데, 이번은 오히려 비대하게 키운 것과 비교하여 '나는 사실 이렇게 작은 것에 불과하였어,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해' 하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하여 두 사람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남산 타워 아래 앉은 것으로도 온전히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고요.